[비평] 낭만주의와 열정의 종식 - 은희경 ‘새의 선물’

입력 2021.07.18 (21:35) 수정 2021.07.1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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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의 선물>(1995)은 작가 은희경의 출세작이자 199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문학동네 소설상>의 제1회 수상작이 됨으로써 세상에 나왔죠. 평단의 좋은 평가와 독자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흔치 않은 작품이 <새의 선물>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정도로는 부족하죠. 시대정신과의 접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 살펴볼까요.

2.
일단, <새의 선물>은 매우 잘 짜인 작품입니다. 1969년, 시골 소읍에 살림집 두 채와 가겟집 한 채로 구성된 감나무집이 있습니다. 살림집 한 채에는 주인공 진희네 가족이 살고, 다른 한 채에는 장군이네 엄마가 하숙을 칩니다. 그리고 가겟집에는 양복점, 양장점, 미장원, 사진관이 들어서 있죠. 세 채의 집 가운데 마당이 있고, 우물과 감나무가 있습니다. 감나무집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동네라고 해야 할 정도죠. 진희 할머니가 집주인이고요.

여섯 그룹의 식구들과 그 지인들 이야기가 소설 전체에 펼쳐져 있습니다. 인물들이 많으니 사연도 많을 수밖에요. 연애할 사람들은 연애하고, 욕망할 사람들은 욕망합니다. 사랑과 배신이 뒤얽힙니다. 돈을 훔쳐 달아나기도 하고, 화재 사고가 터져 가슴 아프게 세상을 떠나기도 해요. 1969년 시골 읍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이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거죠.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가슴 아프게 묘사됩니다. 이런 솜씨 자체가 뛰어나다는 것이 <새의 선물>의 큰 장점이죠.


3.
<새의 선물>의 주인공, 초등학교 5학년인 12살 강진희는 한국소설사가 오래 기억하게 될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조숙한 소녀 강진희는 삶에 대한 지적인 통찰을 보여주는 매우 쿨한 인물이죠. 21살 난 이모보다 훨씬 더 이지적이고 정서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요. 진희라는 인물의 모습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성격을 웅변합니다.

강진희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소설의 일인칭 화자이기도 해요. 이 지적인 소녀의 생각과 목소리로 구현되는 아이러니의 세계가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동력입니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이것은 12살 난 깜찍한 여주인공 진희가, 자기를 매혹시켰던 사람의 하모니카 소리가 엉뚱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하고 내뱉은 말입니다. 멀리 제방 위에 하모니카를 불었던 사람은 서울에서 온 멋진 대학생 청년이 아니라 추레한 중늙은이였던 것이죠.

진희의 생각과 행동의 바탕에 있는 것은 낭만주의와 열정의 종식입니다. 사랑이라는 환상의 종말이라 해도 마찬가지 말입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진희라는 인물의 모습은 탈-열정과 환멸의 시대를 대표합니다. 진희의 통찰력과 인식의 깊이는 삶 그 자체를 향해 있어요. 그런 점에서 이전 시대와 구분됩니다. 진희가 1980년대에 등장했다면, 진희가 지닌 지적 능력의 지향성은 역사나 사회적 현실을 향해 갔을 것입니다. 진희의 생각과 행동이 대표하는, 삶에 대한 가차 없는 시선은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4.
진희의 가족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새로운 정신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역사와 사회적 현실이 강조되던 시대에서, 한 개인의 존재와 그 의미가 부각되는 시대로의 전환이 그것입니다.

진희의 가족은 외할머니와 이모, 삼촌으로 구성됩니다. 진희 엄마는 전쟁으로 인해 우울증을 얻었고 진희를 남긴 채 자살한 것으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진희 아버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는데 소설 마지막에 가서야, 마치 왕이 귀환하듯이 등장하죠.

소설에서 진희 부모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비밀스런 존재이지만, 서사 구성 전체로 보자면 부모의 비밀은 외삽적이고 부가적이에요.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입니다. 진희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가살이하는 고아라고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새의 선물>에 설정된 진희 부모의 이 같은 모습은 그 자체로 시대정신의 변화를 함축합니다. 이전 시대의 서사에서 크게 위력을 발휘했던 가족 모델이 있지요. ‘유린당한 신체로서의 어머니-국토와 상처 입은 정신으로서의 아버지-조국’ 같은 틀이 그것입니다. <새의 선물>에서 이런 틀은, 마치 쓸모를 잃었지만 아직 형태는 남아 있는, 퇴화된 기관과도 같은 모양이죠.

1990년대는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만들어진 87년 체제가 현실의 토양 위에 뿌리내리는 시기입니다. 헌법이 개정된 1987년에서부터 그 정신이 현실로 구체화된 1997년까지의 10년은, 새로운 시대정신이 육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격렬한 몸부림을 보여줍니다. 하나회 숙청이나 광주학살의 주모자들을 법정에 세웠던 일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문화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는 획시기적인 때였죠. 사전 검열이 철폐됨으로써 영화와 대중음악이 자기 고유의 도약을 시작했어요. 2021년 현재 우리는 그 눈부신 결과를 누리고 있는 중이고요.

<새의 선물>에 은은한 것은, 혼자 울고 있는 12살 소녀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엄마의 불행이나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라 하는 것은 핑계로 보입니다. 자기 사랑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때문이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희가 혼자 흘리는 눈물의 이유는 그런 핑계 너머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이 지닐 수밖에 없는 좀더 근원적인 상실감 때문이라 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을 존재론적 정서라 부를 수 있을 텐데, 문학사적으로 보자면, 격렬했던 역사와 현실의 압박이 할 걸음 물러서고 난 다음에야, 그러니까 1987년이라는 벽을 넘어서 환멸의 시대를 통과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좀더 생생해질 수 있는 느낌이라 하겠습니다. 다양한 서사적 장치를 통해 <새의 선물>이 포착해내는 것이 바로 그 느낌입니다. 사람들이 <새의 선물>에 오랜 동안 공감할 수 있음도 바로 그 느낌이 가진 보편성 때문일 것입니다.

서영채/문학평론가·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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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낭만주의와 열정의 종식 - 은희경 ‘새의 선물’
    • 입력 2021-07-18 21:35:48
    • 수정2021-07-18 21:36:06
    취재K
1.
<새의 선물>(1995)은 작가 은희경의 출세작이자 199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문학동네 소설상>의 제1회 수상작이 됨으로써 세상에 나왔죠. 평단의 좋은 평가와 독자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흔치 않은 작품이 <새의 선물>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정도로는 부족하죠. 시대정신과의 접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 살펴볼까요.

2.
일단, <새의 선물>은 매우 잘 짜인 작품입니다. 1969년, 시골 소읍에 살림집 두 채와 가겟집 한 채로 구성된 감나무집이 있습니다. 살림집 한 채에는 주인공 진희네 가족이 살고, 다른 한 채에는 장군이네 엄마가 하숙을 칩니다. 그리고 가겟집에는 양복점, 양장점, 미장원, 사진관이 들어서 있죠. 세 채의 집 가운데 마당이 있고, 우물과 감나무가 있습니다. 감나무집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동네라고 해야 할 정도죠. 진희 할머니가 집주인이고요.

여섯 그룹의 식구들과 그 지인들 이야기가 소설 전체에 펼쳐져 있습니다. 인물들이 많으니 사연도 많을 수밖에요. 연애할 사람들은 연애하고, 욕망할 사람들은 욕망합니다. 사랑과 배신이 뒤얽힙니다. 돈을 훔쳐 달아나기도 하고, 화재 사고가 터져 가슴 아프게 세상을 떠나기도 해요. 1969년 시골 읍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이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거죠.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가슴 아프게 묘사됩니다. 이런 솜씨 자체가 뛰어나다는 것이 <새의 선물>의 큰 장점이죠.


3.
<새의 선물>의 주인공, 초등학교 5학년인 12살 강진희는 한국소설사가 오래 기억하게 될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조숙한 소녀 강진희는 삶에 대한 지적인 통찰을 보여주는 매우 쿨한 인물이죠. 21살 난 이모보다 훨씬 더 이지적이고 정서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요. 진희라는 인물의 모습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성격을 웅변합니다.

강진희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소설의 일인칭 화자이기도 해요. 이 지적인 소녀의 생각과 목소리로 구현되는 아이러니의 세계가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동력입니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이것은 12살 난 깜찍한 여주인공 진희가, 자기를 매혹시켰던 사람의 하모니카 소리가 엉뚱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하고 내뱉은 말입니다. 멀리 제방 위에 하모니카를 불었던 사람은 서울에서 온 멋진 대학생 청년이 아니라 추레한 중늙은이였던 것이죠.

진희의 생각과 행동의 바탕에 있는 것은 낭만주의와 열정의 종식입니다. 사랑이라는 환상의 종말이라 해도 마찬가지 말입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진희라는 인물의 모습은 탈-열정과 환멸의 시대를 대표합니다. 진희의 통찰력과 인식의 깊이는 삶 그 자체를 향해 있어요. 그런 점에서 이전 시대와 구분됩니다. 진희가 1980년대에 등장했다면, 진희가 지닌 지적 능력의 지향성은 역사나 사회적 현실을 향해 갔을 것입니다. 진희의 생각과 행동이 대표하는, 삶에 대한 가차 없는 시선은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4.
진희의 가족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새로운 정신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역사와 사회적 현실이 강조되던 시대에서, 한 개인의 존재와 그 의미가 부각되는 시대로의 전환이 그것입니다.

진희의 가족은 외할머니와 이모, 삼촌으로 구성됩니다. 진희 엄마는 전쟁으로 인해 우울증을 얻었고 진희를 남긴 채 자살한 것으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진희 아버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는데 소설 마지막에 가서야, 마치 왕이 귀환하듯이 등장하죠.

소설에서 진희 부모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비밀스런 존재이지만, 서사 구성 전체로 보자면 부모의 비밀은 외삽적이고 부가적이에요.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입니다. 진희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가살이하는 고아라고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새의 선물>에 설정된 진희 부모의 이 같은 모습은 그 자체로 시대정신의 변화를 함축합니다. 이전 시대의 서사에서 크게 위력을 발휘했던 가족 모델이 있지요. ‘유린당한 신체로서의 어머니-국토와 상처 입은 정신으로서의 아버지-조국’ 같은 틀이 그것입니다. <새의 선물>에서 이런 틀은, 마치 쓸모를 잃었지만 아직 형태는 남아 있는, 퇴화된 기관과도 같은 모양이죠.

1990년대는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만들어진 87년 체제가 현실의 토양 위에 뿌리내리는 시기입니다. 헌법이 개정된 1987년에서부터 그 정신이 현실로 구체화된 1997년까지의 10년은, 새로운 시대정신이 육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격렬한 몸부림을 보여줍니다. 하나회 숙청이나 광주학살의 주모자들을 법정에 세웠던 일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문화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는 획시기적인 때였죠. 사전 검열이 철폐됨으로써 영화와 대중음악이 자기 고유의 도약을 시작했어요. 2021년 현재 우리는 그 눈부신 결과를 누리고 있는 중이고요.

<새의 선물>에 은은한 것은, 혼자 울고 있는 12살 소녀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엄마의 불행이나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라 하는 것은 핑계로 보입니다. 자기 사랑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때문이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희가 혼자 흘리는 눈물의 이유는 그런 핑계 너머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이 지닐 수밖에 없는 좀더 근원적인 상실감 때문이라 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을 존재론적 정서라 부를 수 있을 텐데, 문학사적으로 보자면, 격렬했던 역사와 현실의 압박이 할 걸음 물러서고 난 다음에야, 그러니까 1987년이라는 벽을 넘어서 환멸의 시대를 통과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좀더 생생해질 수 있는 느낌이라 하겠습니다. 다양한 서사적 장치를 통해 <새의 선물>이 포착해내는 것이 바로 그 느낌입니다. 사람들이 <새의 선물>에 오랜 동안 공감할 수 있음도 바로 그 느낌이 가진 보편성 때문일 것입니다.

서영채/문학평론가·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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