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미포 조선소에서 잠수 작업을 하다 숨진 하청 노동자 김기범 씨 영정 사진
하청 업체 대표는 잠적했고, 원청은 "하청 대표와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12월 30일, HD현대미포 조선소에서 잠수 작업을 하다 스물두 살 청년 김기범 씨가 숨졌습니다. 이 사고에 제대로 된 '책임'을 지는 이는 2주가 지난 지금도 없습니다. 2인 1조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고, 불과 일한 지 3개월 된 직원을 5kg 산소통만 지고 바다에서 작업하게 했지만 "잘못했다"고 말하는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청 업체는 '노동자'를 탓하고 있습니다. 유가족에게는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으면서도, 수사 기관인 해경과 고용노동부에는 "기범 씨가 멋대로 (바다에) 들어간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심지어 동료 잠수부를 회유하려는 정황도 KBS 취재 결과 포착됐습니다. 사과와 애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유가족은 지쳐가고 있습니다.
[연관 기사] “엄마, 생일 선물 사줄게”…스물둘 기범 씨, 조선소 바다에서 숨졌다 (2025.01.0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46896&ref=A
[연관 기사] 7달 전 사고와 ‘판박이’…반복되는 사고 왜? (2025.01.0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48524&ref=A
■ 하청업체 대표 "기범이 잘못으로 몰고 가야 산다" 허위 진술 종용
기자 : 혹시 대표님 언제 오신다는 얘기는 없나요? 대한마린산업 관계자 : "대표님 저희도 연락이 안 돼서요." |
김기범 씨가 고용된 HD현대미포의 하청업체 '대한마린산업'에 취재진이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대표가 자리를 비웠다"는 말만 반복할 뿐,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직원은 없었습니다. 대표 연락처로 전화하고 문자메시지를 남겨봤지만, 회신도 없었습니다.
사고 발생 직후 대표는 원청의 연락조차 받지 않으며 사실상 '잠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난주 해경과 고용노동부의 잇따른 소환 조사 통보에는 응했습니다.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조사에 들어간 해경에, 대표는 "작업자에게 잘못이 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고용노동부 조사에서는 "(작업자가) 멋대로 들어갔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청업체 대표가 동료 잠수부 노동자들에게는 "기범이 잘못으로 몰고 가야 산다"며 회유하려 한 정황도 포착됐습니다. 해경의 조사에 응하기 전에 사무실로 동료 잠수부를 불러 "기범이 과실이 크고, 우리 과실은 없게 '(잠수) 교육이 돼 있다'라고 말하라"고 종용했다는 겁니다. 동료 잠수부들은 "(업체 측의) 아무런 교육이 없었는데 '교육했다'는 진술을 하라고 해서 황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동료들은 사업장의 특성을 고려한 기본적인 안전 수칙을 오히려 기범 씨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잠수부 중 경력이 제일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기범 씨는 입사 3개월 차에 불과했습니다.
■ 원청 HD현대미포 "도의적 책임…하지만 관리 책임과 보상은 하청의 몫"
원청인 HD현대미포는 유가족 측 법률 대리인과 대화에 나서고 있습니다. 재발 방지 대책으로 잠수사와 감시자가 소통할 수 있는 무선 통신 기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등 사고 수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청 기업 없이 수습에 들어가면 나쁜 선례를 만들 수 있다"며 장례 지원 외에는 사고 규명에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취재진에게도 "대한마린산업은 HD현대미포 외에도 많은 기업과 하청 계약을 맺은 곳"이라며 "김기범 씨는 HD현대미포 '소속' 하청 노동자는 아니다"라고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원청은 잠적한 하청 대표를 핑계 대며 장례 이후 진상 조사 절차에는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고, 하청 기업은 '모르쇠'로 노동자 탓을 하고 있습니다. 사고 피해자는 있는데, 책임지려는 이는 아무도 없는 셈입니다.
■ "가끔 꿈에 나와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해줘"…유가족은 아직 빈소에
하청과 원청 기업이 잠적과 버티기로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사이, 유가족들은 일상을 빼앗긴 채 열흘째 빈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말에도 원청인 HD현대미포가 미온적 입장을 보이고, 하청인 대한마린산업은 침묵을 지키면서 발인은 기약 없이 미뤄졌습니다.
유족들은 기업으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고, 책임 있는 조치를 약속받아야 기범 씨의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유가족과 변호인 측은 오늘(14일) 부산지방고용노동청에서 원·하청 기업을 고소하고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입니다.
기범 씨를 떠나보내지 못한 누나는 기범 씨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썼습니다. 누나는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동생에게 "나 잘하고 있니"라며 자책하기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며 의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기범 씨를 향한 편지 일부를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 공개합니다.
안녕 김기범, 너한테 편지 쓰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이렇게 허망하게 너를 떠나보내니 인생이 참 공허하구나 싶고 후회도 많이 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우리 집에서 네가 떠날 때 내가 너무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 말로만 잘 가라고 했는데, 그래도 얼굴 내밀고 "누나 나 간다" 해줘서, 너의 마지막 모습이 그 모습으로 남아줘서 고마워. 나 잘하고 있니? 우리 가족 모두 이런 일이 처음이라 네가 옆에서 많이 답답해하고 있을 것 같아. 너도 그 사람들에게 사과를 받아야 마음 편히 갈 텐데.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은 사과할 생각이 없네. 그래도 내가 마음 독하게 먹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어. 응원해 주라. 너도 너무 답답해하지 말고 더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 우리 가족들은 내가 지킬게, 너는 힘도 없고 비리비리한 누나가 뭘 지키냐고 할 것 같지만 노력해 볼게. 이렇게 더럽고 힘든 세상에 미련 가지지 말고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에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라. 가끔 꿈에 나와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해주고. 네 빈자리가 크겠지만 노력해 볼게. 보고 싶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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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범이 잘못으로 몰고 가야 산다”…죽은 노동자를 탓하는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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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1-14 07:00:54
하청 업체 대표는 잠적했고, 원청은 "하청 대표와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12월 30일, HD현대미포 조선소에서 잠수 작업을 하다 스물두 살 청년 김기범 씨가 숨졌습니다. 이 사고에 제대로 된 '책임'을 지는 이는 2주가 지난 지금도 없습니다. 2인 1조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고, 불과 일한 지 3개월 된 직원을 5kg 산소통만 지고 바다에서 작업하게 했지만 "잘못했다"고 말하는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청 업체는 '노동자'를 탓하고 있습니다. 유가족에게는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으면서도, 수사 기관인 해경과 고용노동부에는 "기범 씨가 멋대로 (바다에) 들어간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심지어 동료 잠수부를 회유하려는 정황도 KBS 취재 결과 포착됐습니다. 사과와 애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유가족은 지쳐가고 있습니다.
[연관 기사] “엄마, 생일 선물 사줄게”…스물둘 기범 씨, 조선소 바다에서 숨졌다 (2025.01.0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46896&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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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48524&ref=A
■ 하청업체 대표 "기범이 잘못으로 몰고 가야 산다" 허위 진술 종용
기자 : 혹시 대표님 언제 오신다는 얘기는 없나요? 대한마린산업 관계자 : "대표님 저희도 연락이 안 돼서요." |
김기범 씨가 고용된 HD현대미포의 하청업체 '대한마린산업'에 취재진이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대표가 자리를 비웠다"는 말만 반복할 뿐,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직원은 없었습니다. 대표 연락처로 전화하고 문자메시지를 남겨봤지만, 회신도 없었습니다.
사고 발생 직후 대표는 원청의 연락조차 받지 않으며 사실상 '잠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난주 해경과 고용노동부의 잇따른 소환 조사 통보에는 응했습니다.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조사에 들어간 해경에, 대표는 "작업자에게 잘못이 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고용노동부 조사에서는 "(작업자가) 멋대로 들어갔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청업체 대표가 동료 잠수부 노동자들에게는 "기범이 잘못으로 몰고 가야 산다"며 회유하려 한 정황도 포착됐습니다. 해경의 조사에 응하기 전에 사무실로 동료 잠수부를 불러 "기범이 과실이 크고, 우리 과실은 없게 '(잠수) 교육이 돼 있다'라고 말하라"고 종용했다는 겁니다. 동료 잠수부들은 "(업체 측의) 아무런 교육이 없었는데 '교육했다'는 진술을 하라고 해서 황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동료들은 사업장의 특성을 고려한 기본적인 안전 수칙을 오히려 기범 씨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잠수부 중 경력이 제일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기범 씨는 입사 3개월 차에 불과했습니다.
■ 원청 HD현대미포 "도의적 책임…하지만 관리 책임과 보상은 하청의 몫"
원청인 HD현대미포는 유가족 측 법률 대리인과 대화에 나서고 있습니다. 재발 방지 대책으로 잠수사와 감시자가 소통할 수 있는 무선 통신 기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등 사고 수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청 기업 없이 수습에 들어가면 나쁜 선례를 만들 수 있다"며 장례 지원 외에는 사고 규명에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취재진에게도 "대한마린산업은 HD현대미포 외에도 많은 기업과 하청 계약을 맺은 곳"이라며 "김기범 씨는 HD현대미포 '소속' 하청 노동자는 아니다"라고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원청은 잠적한 하청 대표를 핑계 대며 장례 이후 진상 조사 절차에는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고, 하청 기업은 '모르쇠'로 노동자 탓을 하고 있습니다. 사고 피해자는 있는데, 책임지려는 이는 아무도 없는 셈입니다.
■ "가끔 꿈에 나와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해줘"…유가족은 아직 빈소에
하청과 원청 기업이 잠적과 버티기로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사이, 유가족들은 일상을 빼앗긴 채 열흘째 빈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말에도 원청인 HD현대미포가 미온적 입장을 보이고, 하청인 대한마린산업은 침묵을 지키면서 발인은 기약 없이 미뤄졌습니다.
유족들은 기업으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고, 책임 있는 조치를 약속받아야 기범 씨의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유가족과 변호인 측은 오늘(14일) 부산지방고용노동청에서 원·하청 기업을 고소하고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입니다.
기범 씨를 떠나보내지 못한 누나는 기범 씨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썼습니다. 누나는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동생에게 "나 잘하고 있니"라며 자책하기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며 의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기범 씨를 향한 편지 일부를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 공개합니다.
안녕 김기범, 너한테 편지 쓰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이렇게 허망하게 너를 떠나보내니 인생이 참 공허하구나 싶고 후회도 많이 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우리 집에서 네가 떠날 때 내가 너무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 말로만 잘 가라고 했는데, 그래도 얼굴 내밀고 "누나 나 간다" 해줘서, 너의 마지막 모습이 그 모습으로 남아줘서 고마워. 나 잘하고 있니? 우리 가족 모두 이런 일이 처음이라 네가 옆에서 많이 답답해하고 있을 것 같아. 너도 그 사람들에게 사과를 받아야 마음 편히 갈 텐데.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은 사과할 생각이 없네. 그래도 내가 마음 독하게 먹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어. 응원해 주라. 너도 너무 답답해하지 말고 더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 우리 가족들은 내가 지킬게, 너는 힘도 없고 비리비리한 누나가 뭘 지키냐고 할 것 같지만 노력해 볼게. 이렇게 더럽고 힘든 세상에 미련 가지지 말고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에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라. 가끔 꿈에 나와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해주고. 네 빈자리가 크겠지만 노력해 볼게. 보고 싶을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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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천 기자 hub@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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